거울형 회화_mixed media_26x25cm_2022
거울형 회화_mixed media_26x25cm_2022
거울형 회화_mixed media_26x25cm_2022
거울형 회화_mixed media_26x25cm_2022
거울을 통해 삶의 본질을 들여다 보는 작가
주재료로 낡은 거울이 등장하고 사진이 익숙해지기 전의 이미지를 차용하여 자연스럽게 다가오지만 동양, 서양인지 알 수 없는 모습들과 소통의 한 요소로 인물 또는 현재나 과거 미래를 오고 가며 기억을 끌고 올 수도 있다.  낡은 것을 이용해서 무언가를 해보고 싶었던 충동이 강했던 그는 거울의 기능성을 덜어내고 이미지를 채워 이러한 요소를 해체하는 과정을 레이어로 담았다. 안을 들여다보고 또 다른 세계와 공간, 복합적 요소를 가져다주는 점이 배가 되는 작품들이다.

작가는 단순한 재료에서 오는 것에 집중이 가능하냐는 질문을 던졌으며, 추상작업을 소통의 수단으로 보여 줬을 때 여전히 어려운 요소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미술인으로서 적극적인 소통을 생각해 본 적 없이 멀리 바라보고 내 일만 하면 되느냐에 대한 의구심이 들었고, 그런 그에게 우리 생활에 일상화가 되어있으며 반사체가 가진 특성을 통해 안이 들여다보이고 바깥을 반사해 내는, 즉 안과 밖을 동시에 볼 수 있는 거울은 흥미의 대상이 되었다. 그의 작업은 시간성에 관한 것과 소통의 방법 그리고 매개체의 역할에 조금 더 충실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감을 가지게 되며, 보는 각도와 위치 따라 다양한 상상과 바라보는 사람의 개입이 가능하게 된다는 점에서 연결고리가 생겨 친숙함이 생긴다.

거울 뒷면을 부식 시키거나 도구로 긁어 행위를 기록하는 작가는 이미 시간은 그 물질 자체에 기록되어 있다 생각하여 다른 행위는 절제하였다.  2023년 10월 노화랑에서의 전시 평론 글에서 임대식은 “이열 작가의 거울은, 그 거울을 보고 있는 나를 비추고 있다기 보다는 어쩌면 거울이 만들어지기 이전부터 있었을 역사를 반사적으로 나에게 비춰주고 있는 것 같다. 거울 속의 또 다른 거울.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유명인이기도 하고, 르네상스 시기 어느 궁에서 홀로 쓸쓸히 사라져 갔을 누군가의 초상이 바로 작가의 거울 속의 거울이다. 죽음을 두고, 지금의 삶을 반성하고 성찰하는 의미로 ‘바니타스’는 삶에 대한 욕망과 집착이 오히려 이 삶을 얼마나 헛되게 하는지를 묻는다. 그 상징으로 거울이 등장한다. 이는, 지금 내가 보고 있는 나에 대한 가장 일차적인 성찰의 매체이기도 하다.” 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동세대인으로서 살아가며 미술가가 주는 울림이 있을 때 그것을 반영하여 작업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감으로 작업을 계속 진행하는, 특정 형태를 고집하지 않는 이열 작가의 작품은 우리에게 다양함을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 준다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열 40번째 개인전 '거울형 회화' 전시 소개글 중 (출처: 아트앤컬처 2023-10-15)
거울형 회화_mixed media_43.5x39.5cm_2022 / 거울형 회화_mixed media_65x50cm_2022 / 거울형 회화_mixed media_65.5x37cm_2022
거울형 회화_mixed media_43.5x39.5cm_2022 / 거울형 회화_mixed media_65x50cm_2022 / 거울형 회화_mixed media_65.5x37cm_2022
Reflection Art
Frame & Mirror Painting 
Reflection, 보통 반사라 알고 있는 이 단어는 제일 기본적으로 (거울 등에 비친) ‘상(像)’을 의미한다. 거울에 비친 모습을 설명하며 자연스럽게 반사의 뜻이 더해졌고, 이것이 심화하여 ‘반영’의 의미까지 더해졌다. 그리고 이에 덧붙여 ‘심사숙고’라는 의미도 있다. 인간이 거울에 반사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자아 성찰한 데서 의미가 더해졌을 것이라 보통 보는데, 이렇게 다중적이고 복합적인 의미들이 거울로부터 유래되었다는 점에서 충분히 추상 회화의 매체로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2018-2020_Overlap  중첩 
2014년 본격적으로 거울 작업에 착수하고 그 이듬해 파리 시테 제 자르(Cité internationale des arts)에서 레지던시를 하면서 거울형 회화는 더욱 구체적으로 발전했다. 파리의 플리마켓과 빈티지샵들을 누비며 앤틱 거울과 액자들을 찾아냈는데 지금도 낡고 삭은 오래된 거울을 마주하면 가슴이 떨린다. 세월을 품고 시간이 축적된 표면은 다양한 녹과 얼룩이 어우러져 붓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회화성을 연출한다. 거울 자체가 갖고 있는 ‘시간’에 ‘기억’과 그에 딸린 ‘이야기’들을 행위로 기록하는데, 이는 그동안 보이지 않는 세계를 어떻게 가시화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며 작업했던 주제 ‘생성공간(生成空間)’과 크게 결이 다르지 않다. 다만 주제의 장이 캔버스에서 거울로 옮겨가며 ‘반사’라는 개념이 더해졌다. 

2018-2023_Oval & Mirror Painting
(CIRCLE 원형)
거울들은 각기 배치되는 공간에 따라 화면에 담는 것이 달라지므로 회화 공간의 확장성이 있는 데다 입체 작업 혹은 설치 또한 가능해 현대미술의 매체로써도 매력적이다. 작업은 전용 특수 용액으로 반사면을 부식시키고 긁어내거나 드로잉으로 행위를 기록하며 시작된다. 거울의 면 뒤에 천을 겹겹이 대 레이어를 구성해 깊이감을 만들어내는데, 이 위에는 보통 자수를 놓는 것과 같이 노동집약적인 작업이 진행된다. 이러한 회화적 표현들을 오래된 거울이 갖고 있는 세월 혹은 자연의 흔적과 어우러지게 하고 어떠한 의미를 가져, 종내는 감정적인 교류를 하는 데 작업의 의의가 있다.

2021_Reflection  반영 
작업 소재로써 거울은 생소할지 모르겠으나 우리의 생활에서 거울은 생생한 현장감을 가지고 있다. 하루에 몇 번씩도 사람들은 거울을 보며, 인테리어나 산업 현장에서도 다양하게 쓰인다. 그렇게 곳곳에 스며들어있는 거울 중 ‘거울형 회화’에 기여한 거울은 나의 오래된 기억 속에서 그 현장감을 잃지 않고 빛발하고 있다.

2022_Time 시간 
2023_Re-restoration 재-복원 
회화(繪畫)란 사전상 평면상에 형상을 그려내는 조형 미술을 뜻한다. 그렇기에 우리가 접하는 회화 작품들은 통상 캔버스 작업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추상 회화 작업을 3, 40년 지속하다 보니 캔버스가 표방하는 기존작업에 매너리즘을 느끼게 되었다. 이를 탈피해 새로운 방식으로 나만의 작업세계를 구축하려 노력하던 중, 철수하던 미군 부대가 남긴 온갖 자재와 물건들 사이에서 거울을 발견하게 되면서 현재는 ‘거울형 회화’라고 명명한 작업 방식이 탄생하였다.
거울형 회화_Mixed Media_117.7x81.3cm_2023 / 거울형 회화_Mixed Media_137x105cm_2023 / 거울형 회화_mixed media_90x65cm_2022
거울형 회화_Mixed Media_117.7x81.3cm_2023 / 거울형 회화_Mixed Media_137x105cm_2023 / 거울형 회화_mixed media_90x65cm_2022

"이열의 예술은 기존 추상화 작업을 뒤로 하고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모색과 혁신의 길을 걸어왔다. 그가 고심하고 연구해왔던 거울 작업은 새로운 회화 문법, 즉 이미지 형태와 양태, 공간 형식과 시간에 대한 태도 등은 물론 더 멀리 예술의 기능에서도 하나의 당당한 회화 언어로 완성됐다. 잘 알려져 있듯 그는 오랜 기간 추상화 작업을 해왔다. 자신이 속한 아카데미의 영향과 그가 활동을 시작하던 당시 화단의 분위기를 자연스레 반영한 결과였다. 그 결과물은 그 나름으로 당대의 요청과 조건에 대응한 것이었기에 정당한 것이었다. 대부분 추상 화가에게 특유한 미적 경험이 있듯 그에게도 그런 경험이 있었다. 그의 추상화는 투명하지만 심연의 깊이를 암시하는 강 표면에 뜬 부유물의 부감시(俯瞰視) 장면과 그 미적 측면을 회화적으로 재해석한 작업이었다." (조경진 평론 일부)

거울형 회화_Mixed Media_62x54cm_2023 / 거울형 회화_mixed media_46.5x36.5cm_2022 / 거울형 회화_Mixed Media_107cm_2023
거울형 회화_Mixed Media_62x54cm_2023 / 거울형 회화_mixed media_46.5x36.5cm_2022 / 거울형 회화_Mixed Media_107cm_2023

"그를 회화의 혁신으로 이끈 문제는 다음과 같은 물음에서 시작한다. “그린다는 일이 왜 캔버스에 물감을 바르는 것으로 규정되어야 하는가? 하나의 작품은 물리적으로 고정된 것인가? 예술작품은 작가 주체의 표현인가?” (필자와의 인터뷰, 2023) 이 세 질문은 그 자체로 급진적이지만, 중요한 것은 그 문제와 해법이 동시대의 예술 환경에 응답하면서 출현했다는 사실이다. 여기엔 구체적 매체로서 회화와 예술 일반의 문제가 섞여 있는데, 그는 자신의 매체인 회화를 재창안하는 과정에서 예술 일반의 문제에 접근한다. 이 점에서 이열의 작업은 한편에선 크라우스R. Krauss의 후기 매체론에 응답한다. 그가 크라우스를 따른다는 것이 아니라, 동시대를 살았던 이들의 회화적(이론적) 문제와 그 직관적(개념적) 해법이 자연스레 대응했다는 의미다. 오늘날 우리가 매체를 어떻게 사고할 수 있는지 크라우스의 매체 특정성 비판이나 기술적 지지체로서 매체 개념, 매체의 재창안 논의 등이 많은 영감을 줬다면, 이열은 예술가의 직관에 따라 이 문제에 매달리면서 그의 언어를 새로운 문법으로 갱신해 왔다." (조경진 평론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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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충남 


홍익대학교 회화과 졸업

홍익대학교 대학원 졸업


홍익대학교 회화과 교수

한국미술협회 이사 역임

서울미술협회 운영위원 역임

오리진 회화 협회 회장 역임


Daejeon, Chungnam (b.1955)


Education

  • Graduated from the Department of Painting, Hongik University
  • Graduated from the Graduate School of Hongik University

Genre/Style

  • Mixed Media

Social & Educational Career

  • Professor, Department of Painting, Hongik University
  • Former Director, Korean Fine Arts Association
  • Former Executive Committee Member, Seoul Fine Arts Association
  • Former President, Origin Painting Association
거울형 회화_Mixed Media_48x59cm_2022
거울형 회화_Mixed Media_48x59cm_2022
거울형 회화_mixed media_49x41cm_2022
거울형 회화_mixed media_49x41cm_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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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상

2012 대한민국 미술인의 날 정예작가상 수상

1998 한국미술작가상

1996 청년작가 초대전 우수상

1993 방글라데시 비엔날레 최고상 수상

1990 대한민국미술대전 대상 수상

 

작품소장처

국립현대미술관

문화예술진흥원

정부종합 3청사

서울시립미술관

부산시립미술관

외무부, 헝가리 대사관

외무부, 스위스대사관

한국일보사

외교통상부

동아대학교병원 등


Awards

  • 2012 Selected Artist Award, Art Day of Korea
  • 1998 Korean Artist of the Year Award
  • 1996 Excellence Award, Young Artists Invitational Exhibition
  • 1993 Grand Prize, Bangladesh Biennale
  • 1990 Grand Prize, Korea Art Exhibition

Collections

  •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Korea (MMCA)
  • Arts Council Korea
  • Government Complex 3rd Building
  • Seoul Museum of Art
  • Busan Museum of Art
  • Ministry of Foreign Affairs, Hungarian Embassy
  • Ministry of Foreign Affairs, Swiss Embassy
  • Han-guk Ilbo
  • Ministry of Foreign Affairs and Trade
  • Dong-A University Hospital, among others
거울형 회화_Mixed Media_83x51cm_2023
거울형 회화_Mixed Media_83x51cm_2023
거울형 회화_Mixed Media_128x88cm_2023
거울형 회화_Mixed Media_128x88cm_2023
거울형 회화_Mixed Media_149.5x113.5cm_2021
거울형 회화_Mixed Media_149.5x113.5cm_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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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전

2024 이열 전-Mirror, 거울-지다 (아트센터자인, 서울)

2023 이열 전 (노화랑, 서울)

2022 이열 전 (H gallery: 초대전, 서울)

2019 이열 전-Art + Practice: 작업으로 실천한 주거공간 (서울)

2018 이열 전 (노화랑, 서울)

2017 이열 전 (김세중 미술관, 서울)

2015 이열 전–Another Time (파리국제예술공동체, 프랑스)

2012 이열 전-대지의 숭고미를 담다 (금호미술관, 서울)

2010 이열 전 (예술의 전당, 서울)

2009 이열 전-생성과 소멸의 연기 (Gallery Ho, 서울)

2007 이열 전-생성공간-변수 (가나인사아트센터, 서울)

2006 그레이트모 스튜디오 오픈 스튜디오 (Greatmore studio,Cape Town) 

2001 이열 전 (일본 후쿠오카 MA갤러리, 후쿠오카) 등 40회


단체전 및 기획초대전

天態万想(천태만상)전 (황성예술관, 북경)  

한국 현대미술 초대전 (아테네 시립 화랑, 아테네)

일․한 현대미술전 (후쿠오카 아시아미술관)

현대회화의 방향전 (수원미술관, 수원)

한국미술, 조형의 모델전 (AKA SEOUL, 서울)

공존-한국미술 오늘의 조망전 (경향갤러리, 서울)

서울현대미술 로마전 (로마건축가협회하우스, 로마)

서울시립미술관남서울분관개관기념-한국현대작가 초대전 (서울시립미술관남서울분관, 서울)

한국현대작가 초대전 (독일국립미술관, 독일) 

에꼴드서울전 (관훈미술관, 서울) 등 300여회



ARTICLE

이열의 거울 회화와
사물의 재창안 

2024. 조경진(연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연구교수)
거울형 회화_mixed media_122x85cm_2022
거울형 회화_mixed media_122x85cm_2022
이열의 예술은 기존 추상화 작업을 뒤로 하고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모색과 혁신의 길을 걸어왔다. 그가 고심하고 연구해왔던 거울 작업은 새로운 회화 문법, 즉 이미지 형태와 양태, 공간 형식과 시간에 대한 태도 등은 물론 더 멀리 예술의 기능에서도 하나의 당당한 회화 언어로 완성됐다. 잘 알려져 있듯 그는 오랜 기간 추상화 작업을 해왔다. 자신이 속한 아카데미의 영향과 그가 활동을 시작하던 당시 화단의 분위기를 자연스레 반영한 결과였다. 그 결과물은 그 나름으로 당대의 요청과 조건에 대응한 것이었기에 정당한 것이었다. 대부분 추상 화가에게 특유한 미적 경험이 있듯 그에게도 그런 경험이 있었다. 그의 추상화는 투명하지만 심연의 깊이를 암시하는 강 표면에 뜬 부유물의 부감시(俯瞰視) 장면과 그 미적 측면을 회화적으로 재해석한 작업이었다.

추상화 작업을 이어가면서도 그의 내면엔 두 가지의 압력이 서서히 자리했을 것이다. 하나는 자신이 살고 있는 동시대의 예술 환경이나 조건을 담아내 회화 언어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예술적 강령이었고, 다른 하나는 예술가 대부분이 그렇듯 그 시대적 조건 아래 자신만의 예술 언어, 이른바 이열 스타일을 확립해야 한다는 요청이었다. 그의 회화 혁신은 기존 회화의 내적 문법만이 아니라, 발화 방식, 의미 작용, 매체적 측면에서 전면적으로 이뤄졌다. 나아가 이 작업은 시공간의 형식성과 이미지의 문법을 갱신하고 회화를 재창안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이 내외적 요구에 부응해 우연히 그의 눈과 마음에 들어온 사물이 2010년 동두천 벼룩 시장에서 본 거울이다. 이 사물은 다른 누구에게는 그저 빈티지 제품이었겠지만, 위의 미적, 예술적 문제를 안고 있던 이열의 눈에는 자신의 예술 작업의 미래를 열어줄 대상이었다.

거울이 이열에게 그저 예술적 의도의 매개물에 그치는 사물이었다면, 그가 10년에 걸친 시간 동안 그것을 붙잡고 씨름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사물은 오랜 추상화 기간 서서히 느꼈던 예술적 갈증을 해소해 줄 것이라고 어렴풋이 약속했지만, 그렇다고 자신을 쉽게 허락할 대상은 아니었고, 이열과 어떻게 기술적, 예술적으로 동맹할 수 있을지의 문제도 남아 있었다. 오늘날 예술가들이 사용하는 일상 사물의 의미는 단순히 발견된 오브제나 그들의 예술 의도나 내용을 표현하는 물리적 매개물에 그치지 않는다. 그들은 인간의 편에서 사물을 예술적으로 이용하기보다 오히려 사물의 편에서 사물 자체의 온갖 잠재력을 끌어내려 한다. 사물이 무엇인지가 ‘사물임thingness’이고, 사물임은 사물이 무엇을 할 수 있음이라면, 사물임 혹은 사물의 의미는 사물의 힘이다. 그 힘은 그 자체로는 감춰져 있지만, 다른 장소나 사물, 어떤 과정과 방식으로 배치되는가가 바로 그 사물임과 힘을 규정한다. 우리 시대는 대체로 사물이나 객체의 자율적 본질보다는 관계적 본질에 더 집중한다. 사물은 다른 사물이나 사람과 연결 배치됨으로써, 그리고 서로 타협함으로써 연결망을 형성하고 사물은 그 안에서 비로소 그것의 힘과 행위를 드러낸다. 이러한 관점은 오늘날 예술가들이 사물(AI나 로봇까지도)이나 물질(장소 등도)을 대하는 태도를 규정한다. 사물은 이제 단순히 예술가의 개념이나 의도를 드러내는 매개라기보다 그들이 동맹하고 타협해야 할 대상이 되었다. 예술가는 오히려 그 타협과 동맹의 과정에서 그가 나아갈 방향을 찾아낸다. 그것은 작가가 자신의 문제 안에서 발견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물이 인도해 주는 길이기도 하다. 과거 우리가 사물의 주인이었다면, 이제 사물은 우리가 어떤 식으로 규정하는 것 그 이상의 존재로 나타나고 있다. 동두천 시장에서 처음 거울이 그에게 다가온 이후 이열에게 거울이라는 사물은 그런 대상이었다.

그에게 거울은 단순한 매체가 아니라 그가 10년을 씨름해 가며 타협하고 모색한 가능성 그 자체이며, 동시에 여전히 이열에게나 관객에게 열려 있는 사물이다. 거울은 은막 바탕, 반영의 속성, 물리적 공간의 틈새와 폭, 프레임을 회화에게 내어줬고, 회화는 그런 바탕이나 공간에서 이미지의 출현이라는 본질적 규칙을 제공했다. 그것은 사물을 매개한 회화 매체의 재해석이라는 점에서 사물과 회화의 동맹이다. 이열에게 거울이 그저 오브제나 매체가 아니라, 그와 동행하는 사물이라는 사실은 그가 거울을 전통적인 회화틀로 변형하지 않고, 수집한 빈티지 거울의 외적 포맷을 그대로 유지하는 이유 중 하나다. 요컨대, 이열의 작업은 거울이라는 사물을 회화 매체로 이용하기보다 거울 안에서, 거울과 함께 회화의 가능성을 모색한다는 점에서 매체의 재창안이면서 동시에 사물의 재창안이다.

그를 회화의 혁신으로 이끈 문제는 다음과 같은 물음에서 시작한다. “그린다는 일이 왜 캔버스에 물감을 바르는 것으로 규정되어야 하는가? 하나의 작품은 물리적으로 고정된 것인가? 예술작품은 작가 주체의 표현인가?” (필자와의 인터뷰, 2023) 이 세 질문은 그 자체로 급진적이지만, 중요한 것은 그 문제와 해법이 동시대의 예술 환경에 응답하면서 출현했다는 사실이다. 여기엔 구체적 매체로서 회화와 예술 일반의 문제가 섞여 있는데, 그는 자신의 매체인 회화를 재창안하는 과정에서 예술 일반의 문제에 접근한다. 이 점에서 이열의 작업은 한편에선 크라우스R. Krauss의 후기 매체론에 응답한다. 그가 크라우스를 따른다는 것이 아니라, 동시대를 살았던 이들의 회화적(이론적) 문제와 그 직관적(개념적) 해법이 자연스레 대응했다는 의미다. 오늘날 우리가 매체를 어떻게 사고할 수 있는지 크라우스의 매체 특정성 비판이나 기술적 지지체로서 매체 개념, 매체의 재창안 논의 등이 많은 영감을 줬다면, 이열은 예술가의 직관에 따라 이 문제에 매달리면서 그의 언어를 새로운 문법으로 갱신해 왔다.

첫 번째 물음에 응답한 그는 ‘그린다’는 회화적 행위를 기술적 사물인 캔버스나 물감의 물리적 속성에서 해방하는 한편, 평면 공간에서 이미지의 출현이라는 더 본질적인 규칙으로 곧장 육박한다. ‘평면에서 이미지의 출현’이라는 상위 문법 안에서 자유로워진 그는 캔버스와 물감이라는 프레임과 배경에서 벗어나 더는 바르지 않으며, 반대로 거울 유리 뒷면의 은막을 긁어내 형태를 만든다. 어떻게 하건 결국 이미지는 출현한다. 문제는 이열이 어떤 이미지를 원하는가고 그 이미지가 다른 것과 무엇이 다른지다. 게다가 여기에 공간과 환영의 오랜 문제도 끼어든다. 캔버스에 발린 물감은 결국 물리적 막에 불과하지만, 오랫동안 회화는 물리적 대상이 아니라 이미지여야 한다는 규범에 매여 이미지를 재현적 환영 공간의 틀 안에 가둬 왔다. 모더니즘 회화가 이 규범을 깨부수고 회화를 재현에서 벗어나게 한 후, 회화는 환영으로 남기보다 개념화, 기호화하거나 순전한 감각적, 미적 대상으로 존재해 왔다. 정보나 문제적 관점이 여전히 유효함에도, 최근 회화는 물질적 생동성을 부각하면서 이미지보다는 물질적 정동 감각으로 존재하려 한다.

이열의 것은 환영으로서 이미지다. 그러나, 이 환영은 물질성을 희생한 환영이 아니라, 오히려 지극히 물질적인 구조에 의해 만들어지는 환영이다. 그의 작업엔 크게 세 개의 물질적 층위가 존재한다. 세부적으로는 총 다섯 층위라고 해도 좋다. 첫 번째 층위는 관객에게 가장 가까운 것으로 거울층이고, 이 층은 물리적으로 앞면과 뒷면이 있으니, 두 개 층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기본 형태는 뒷면의 은경막을 벗겨내서 만들어진다. 우리의 시각에는 언뜻 이미지가 맨 위층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뒷면에 있다. 두 번째 층위는 이 거울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위치한 두 겹의 섬유층이다. 이 역시 두 겹 모두에 이미지가 있고, 전면의 유리층과 더불어 전체 이미지를 형성한다. 마지막 층은 가장 밑면의 거울층인데, 이것은 다시 위의 두 층을 반사해 깊이를 물리적으로 배가하고 전체의 구조적 환영을 생산한다. 특히 이 구조적 환영은 물리적 적층을 통해 형성된 물리적 공간 안에서 가상적으로 형성된 이미지이기에 고유한 공간 형식과 이미지 경험을 제공한다. 물리적 공간성은 마치 디오라마 연극 공간과 같은 느낌을 주고, 이미지는 마치 홀로그램처럼 그 안을 부유하는 것 같은 효과를 자아낸다. 이러한 독특한 공간성은 관객이 이미지의 표면에 머무르지 않고 작품 안으로 들어가 몰입하게 하는 핵심 기술적 지지체가 된다. 그의 작업은 가장 본질적인 부분에서 회화면서도, 동시에 조각도, 연극도 포함하는 특정한 대상이 됐다.

이 구조적 환영과 그 안의 가상 이미지는 물질 안료로 고정된 캔버스 표면의 재현 이미지와 달리 지각자의 관점이나 초점의 위치에 따라 형상이나 미적 포인트가 변화한다. 관객은 전체의 중층 공간이 만든 구조적 환영 이미지에 몰입할 수도, 맨 아래층의 거울에서 반영하고 있는 자신의 이미지를 작품과 겹쳐 보면서 자신이 작품 안에 포함되는 특유의 경험을 하거나, 투명, 투영, 반영의 삼중 속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가상 공간 그 자체에 매료될 수도 있다. 은막이 벗겨진 거울의 유리층은 투명하고, 그 밑의 섬유층은 그 자체로 반투명이면서 이미지를 투영하며, 마지막 거울은 자신 앞의 작업 형태나 작업 외부의 환경을 반영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이미지는 본질적으로 열려 있다. 물리적으로는 고정되어 있다고 해도, 공간이나 이미지로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또 놓이는 장소나 조명, 빛 등 환경을 자신 안에 반영하고 포함할 수 있으며, 그런 한에서 관객에게도 열려 있다. 그저 의미나 해석으로 열려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물리적으로 열려 있다. 이에 그의 작업은 본질적으로 하나의 작업이고자 구체적 환경과 관객을 필요조건으로 한다. 이렇게 두 번째 질문, 하나의 회화 작업은 물리적으로 고정된 것인가라는 물음은 해소된다. 그의 작업은 어떤 면에서 물리적으로 고정되어 있지만, 그 효과나 이미지는 전혀 고정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언제나 관객의 신체, 관객의 시선과 움직임, 구체적인 외부 환경과 함께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는 세 번째 물음, ‘표현’이라는 오래된 족쇄에서도 벗어난다. 작품이 하나의 표현이라고 말하는 것은 작품을 작가 주체나 그가 가진 미적 특권의 틀 안에 매어두는 효과적인 개념으로 기능해왔다. 하지만 작품이 표현이었던 적은 사실 예술의 역사에서 그리 오래되지도, 또 현재 그리 유효한 개념도 아니다. 오늘날 예술은 이제 다른 콘텐츠와 같이 누군가에게 소비될 운명을 가지며, 다만 다른 콘텐츠와 달리 미적, 예술적 콘텐츠로 소비된다. 콘텐츠는 표현을 위한 것이 아니라, 본디 콘텐츠 소비자를 위한 것이다. 이열의 작업도 이런 콘텐츠의 성격을 강하게 띤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그의 작업이 관객에게 열려 있다는 바로 그 점에서도 이미 그렇다.

작업의 프레임을 형성하는 거울은 그가 국내나 국외 여행 중 벼룩시장에서 직접 구매한 빈티지 제품이며 대부분 몇십년에서 백년 이상의 시간을 보내온 물건들이다. 그가 거울 안 형태의 베이스로 삼은 이미지도 마찬가지다. 대부분 오래된 사진 속 익명의 인물이다. 그것들은 특정 역사적 맥락이나 의미를 공유하지 않는다. 반면 그가 빈티지 거울이나 오래된 사진 이미지를 선택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이것들은 이열의 눈에 우연히 들어온 것이지만 명확한 하나의 감각에서 유래했다. 그는 오래된 물건이 주는 감각에 매혹된다. 그것들은 우리의 감각과 지각이 당면한 생존을 위해 ‘지금 여기’의 현재 감각에 집중하며 살 때, 그 감각에 균열을 내고 그 사물만이 홀로 과거에서 이어져 왔다는 느낌, 그래서 우리가 지금 현재만을 사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과거와 이어져 있다는 각별한 느낌을 주는 사물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감각 자체에 머물면 되며, 특정한 형태의 거울의 역사, 인물 이미지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 비록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해도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거울 작업에서 이열 자신을 볼 필요는 없다. 물론 그렇다고 그 작업이 이열과 전혀 상관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거기엔 경대 앞에서 단장하던 어머니의 기억, 어머니와 자신이 같은 거울 공간 안에 반영되면서 느꼈던 통합의 상상 이미지, 그의 유년기 속 놀이 공간 등은 그 자신의 기억과 무의식을 여과하고 있다. 하지만, 이열과 그 이미지의 관계를 추측하는 일은 작가가 바라는 일이 아니다. 그는 관객이 그저 자신의 작품 앞에서 온전히 그들 자신의 이야기를 찾길 바란다. 그는 자신의 작업이 자신의 것으로 주장하기보다 관객 각자에게 소비될 하나의 미적 콘텐츠가 되길 바란다.

그 대상이 주는 감각은 어떤 의미에서 알레고리 감각, 즉 과거와 현재의 차이와 간극에서 오는 감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과거가 우리와 이어져 있다는 느낌을 유발하는 것이기도 하다. 전자의 것이 오웬스(C. Owens)의 알레고리 해석이고, 이열의 것을 그렇게 본다고 해도 가능하겠지만, 그의 것은 후자의 느낌에 더 가깝다. 과거와 현재의 간격이나 사이에서 오는 차이의 느낌, 그 안에서 새로운 의미가 생겨나는 방식을 취하기보다 오히려 연결과 지속의 느낌이 더 강하게 든다. 그래서 그도 이미지를 흐릿하게만 알아볼 수 있는 정도로 남겨뒀다. 그는 과거나 옛 사물이 언제나 우리의 삶을 위해 살아 있으며, 우리에게 지속해서 말을 걸고 있다는 느낌, 우리가 현재와 과거를 함께 살고 있다는 느낌을 활성화하려 한다. 과거는 한낱 지나간 것이 아니라, 현재로 이어져 지속하고 있다. 이열의 작업은 이 점에서 표현이 아니라, 관객에게 어떤 미적 감각을 향유할 수 있게 하고, 그 안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쓸 수 있도록 배려한다.

그의 거울 회화를 이끈 중요 질문이 알려주듯, 그의 작업의 핵심 가치는 작품 안 이미지의 내적 의미나 그것의 맥락보다 오히려 그가 갱신하는 회화의 문법, 즉, 이미지의 양태나 형식, 시공간 형식, 발화 모드에서 회화 매체 자체의 재해석과 재창안의 문제를 관통해 말해져야 한다. 실제로 그도 이미지의 내용보다 그의 매체 혁신에 대해 줄곧 강조해왔다. 하지만, 그의 거울 작업의 탁월성은 그가 어떤 회화적, 예술적 문제로 고민하고 그것을 해소하려 했는지에만 주어지지 않는다. 그 문제는 실제로 구체적인 미적, 형식적 성취로 이어져야 한다. 이열의 작업은 자신만의 매체와 언어를 확립하면서 동시에 미적 차원, 즉 미적 깊이의 차원을 획득했다. 고유한 물리적 속성들의 결합으로 구성된 몰입의 연극적 공간을 고안했고, 그 안에 홀로그램과 같은 구조적 환영을 창조했으며, 결과적으로 그 환영은 우리를 미적 깊이로 인도한다. 그것은 기억 속의 대상이 그 시간의 거리만큼 우리의 의식에 어렴풋이 나타나는 그런 방식으로 나타난다. 이것이 그가 빈티지 사물과 이미지를 이용하는 이유 중 하나다. 이열의 작업은 그 미적 깊이를 안료로 만들어진 이미지의 환영적 차원이 아니라, 물리적 구조에서 명확히 현상할 수 있게 만들었다는 데 고유한 탁월성이 있다. 공간의 안에서부터 부유하듯 어렴풋이 떠오르는 이미지를 매개로 우리는 재현 너머 세계의 깊이, 우리 자신의 과거와 무의식의 깊이, 그 빈티지 사물의 시간과 공간의 깊이로 몰입한다. 그 깊이는 우리가 실재를 체험하고 사고하는 방식의 은유다.

이열의 이 미감은 그가 물 위에 뜬 부유물에서 특유한 미적 경험을 한 후, 이를 미적 모티브로 한 추상화에서 발현됐고, 사실 최근의 거울 회화에까지 일관되게 이어지고 있다. 이 근본 감각, 미적 이념 수준에 다다른 감각은 왜 거울이라는 사물이 그의 눈에 들어왔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예술가를 사로잡는 미적 감각은 결국 감각 세계 한가운데서 그 감각에서 은폐된 실재성이 자신을 드러내는 현상에서 주어진다. 그 실재성은 우리 자신의 것일 수도, 한 사물이나 세계에 관한 것일 수도 있다. 예술작품이라는 사물이 주는 감각 안에서 우리는 이런 실재성의 깊이를 경험한다. 이열에게 이 감각은 투명함에도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 그 깊이와 맞닿지만 겨우 표면적으로만 그 깊이와 연결되는 표층의 이원 구조에 대한 감각이다. 투명한 것은 우리를 깊이로 끌어들이면서 심연의 깊이는 동시에 우리의 접근을 가로막는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심층과 표층 간의 연결과 분리의 이중성이면서 동시에 실재와 감각 간의 대립과 연결의 긴장에서 나타나는 미적 경험이 지니는 구조 자체의 은유다. 이열은 우연히 발견한 구체적인 현상에서 이 구조를 보았고 감각적으로 매혹됐으며, 추상화에서 거울 회화까지 발전해 오면서 이 감각은 그의 예술 세계를 형성한 이념으로서 미감이 됐다. 그의 추상 회화에서는 표면의 감각에 집중했고, 심층은 표면의 감각 효과(이 감각을 위해 안료에 유리 알갱이를 혼합)에 의해 간접적으로 암시되었다면, 이제 거울 회화는 반대로 거울이라는 사물과 반투명 섬유의 물리적 특성을 중층화하면서, 투명하지만 동시에 어두운 심층의 깊이와 가시적 표면의 이원 구조를 물리적으로 직접 구현하고 있다. 이러한 구조와 연출 덕에 가상 공간과 구조적 환영 이미지는 미적 깊이를 탁월하게 성취했다. 이제 우리는 이 구조적 장치와 연출 덕분에 이 이원 구조의 긴장을 선명하게 체험할 수 있다.

요컨대, 그의 작업은 여러 면에서 더는 기존 회화의 물질적 조건이나 문법에 얽매이지 않고, 서로 다른 매체의 특성을 흡수하면서 회화와 예술의 언어를 재창안하고 있다. 그는 자신만의 회화와 그 규칙을 고안하고 발전시키며 독자적인 회화 언어로 확립하고 있다. 예술가에겐 언제나 자신의 언어를 정립하면서, 동시에 우리 시대의 언어를 혁신하라는 요청이 무의식적 강령으로 주어진다. 동시대 사람이 동시대의 작업을 하지 않으면 다른 누가 그것을 해줄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예술가마다 그의 언어가 갱신하는 요소는 다를 수 있다. 그것은 매체와 관련될 것일 수도, 시각성이나 발화 방식, 공간이나 시간 형식일 수도, 형식성 자체에 관한 것일 수도 있다. 회화나 예술의 가치는 여러 관점에서 말해질 수 있다. 경제적 가치나 사회, 역사적 가치가 그런 것일 테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미술사를 기술하려 할 때, 그것이 사회사가 아니라 미술사라면 첫째로 고려할 사항은 예술작품의 미적, 예술적 가치다. 우리는 이를 잘 알고 있기에 은연중에 매체나 언어의 새로움과 그것의 동시대성에 주목한다. 이열은 우리 시대가 요청하는 사물에 대한 태도로 무장하고, 사물과 타협하고 동맹하면서 새로운 회화적 공간 형식과 이미지 양태를 제시하며 거울 회화라는 고유한 매체 언어를 잉태했다. 이 언어는 이열 자신의 근본 미감을 여과하면서 그 성취의 질은 배가됐고 탁월성을 얻었다. 그의 미적 성취는 마땅히 회화의 재창안이자, 사물의 재창안이라 불려야 할 것이다. 그는 자주 거울이 자신의 작업에서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이는 그가 거울과 함께 한 예술 여정과 모험을 완료형이자 진행형으로 여기고 있다는 뜻이다. 그가 또 어떤 방식을 내놓을지는 예술환경은 물론 거울과 이열, 그리고 그들의 사이에 달려 있다. 이렇게 그는 자신의 예술에 내재한 미적, 예술적 가치, 그것이 회화사의 한 페이지에 기록되어야 할 이유를 스스로 충분히 증명하고 있다.
거울형 회화_mixed media_90x65cm_2022
거울형 회화_mixed media_90x65cm_2022

너의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 


2023. 임대식(미술비평, 쌀롱 아터테인 대표)

내가 나를 바라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나를 비추고 있는 것들이다. 예를 들어, 물에 비춰진 나의 모습에 너무나 심취하여 그 물속으로 빠져버린 나르시스처럼, 격정적이지는 않겠지만 내가 나를 볼 수 있다는 것은 정신적 사고를 넘어 즉각적으로 나는 누구일까라는 가장 현실적인 질문에 답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누군가에 보여지고 있구나… 라는 것은 나에 대한 깨달음 보다는 나에게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여야 하는 정체성의 혼란이 시작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불행하게도 나의 얼굴은 나의 눈으로는 절대 볼 수 없다. 물이나 거울 같은 반사체들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결국,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면서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거나 감정적 이입이 가능해 짐으로써 빠르게 사회화 되었다. 물론, 거기에는 과학적 소통 방법인 언어와 문자 그리고 직립보행으로 자유로워진 손이 크게 한 몫을 하긴 했지만. 어찌 되었든, 인류는 나를 비추는 무엇인가를 통해 끊임없이 나는 누구인가를 질문하게 되었고, 그 답은 여전히 연구 중이다. 그리고 그 질문은 더 이상 거울에 비춰진 나, 개인의 질문이 아니게 되었다. 


어린 시절, 거울을 바닥에 놓고 그 속을 들여다 본 경험은 누구나 있었을 것이다. 천정이 보이고 그 천정이 보이는 거울의 공간에 비쳐지는 세계에서만큼은 내가 절대적이었다. 날 수도 그리고 빠르게 그 공간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충만한 자신감이 생겼었다. 당시에는, 세상을 뒤집어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상상이었겠지만, 거울에는 언제나 다른 세상으로 갈 수 있는 길이 놓여져 있었던 것 같다. 


이열 작가의 거울은, 그 거울을 보고 있는 나를 비추고 있다기 보다는 어쩌면 거울이 만들어지기 이전부터 있었을 역사를 반사적으로 나에게 비춰주고 있는 것 같다. 거울 속의 또 다른 거울.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유명인이기도 하고, 르네상스 시기 어느 궁에서 홀로 쓸쓸히 사라져 갔을 누군가의 초상이 바로 작가의 거울 속의 거울이다. 죽음을 두고, 지금의 삶을 반성하고 성찰하는 의미로 ‘바니타스’는 삶에 대한 욕망과 집착이 오히려 이 삶을 얼마나 헛되게 하는지를 묻는다. 그 상징으로 거울이 등장한다. 이는, 지금 내가 보고 있는 나에 대한 가장 일차적인 성찰의 매체이기도 하다. 


이열 작가의 거울에 담겨있는 또 하나의 메시지는 시간을 넘나들고 싶을 정도의 깊은 그리움이다. 그가 처음으로 거울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 역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수 많은 시간 동안 어머니의 얼굴을 담고 있었을 낡은 어머니의 경대에서부터 그의 거울 작업은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거울은 많은 사람들의 지난한 삶의 역사를 우리가 직접 볼 수 는 없겠지만, 기억하고 기록하고 있었다. 


그런 의미로, 작가는 오래된 거울 프레임을 복원하고 재생하면서 당시에 그 거울을 보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지금의 감성으로 새롭게 이어왔다. 역사적 그리움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오래 전에 만들어진 액자들을 복원해 내는 작업은 상당히 예민하고 지난한 작업이었다. 그러나 그 작업을 통해, 작가는 당시의 문화를, 그리고 트랜드를 읽을 수 있었을 것 같다. 아름다움에 대한 생각들과 당시 예술활동의 범위 내지는 방법들을. 


거울이 단순하게 나만을 비추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한 시대의 어느 한 장면을 기억하고 기록하고 있다는 것을 믿는다면, 오늘 아침 샤워를 하며 비춰본 나의 거울에 나는, 어떻게 기록되었을까. 그리고 역사는 나의 거울을 어떻게 해석하게 될 것인지, 너무나 당연하게 숨쉬는 것처럼 나를 비추던 모든 것들에 이제 조금은 더 진지하게 그 앞에 서야 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거울형 회화_mixed media_79.5x59.5cm_2022
거울형 회화_mixed media_79.5x59.5cm_2022

추상화가 이열의 근작: 

회화적 흔적, 시간의 흔적  


2019. 정연심(홍익대학교 예술학과 교수, 전시기획/비평)

이열은 1989년 바탕골 미술관에서 첫 개인전을 개최하며 <생성공간-변수>를 중심으로 주로 추상회화를 제작해왔다. 여백의 공간에서는 동양의 필묵에서 느껴지는 선의 역동성과 유영하는 색채를 느낄 수 있다. 이러한 <생성공간-변수>는 우연적이면서도 동시에 절제되어 있어 선과 여백, 색채는 하나가 된다. 그의 작업은 단색화처럼 물성이 드러나지만 일정한 그리드 조직과 같은 균일성이 배제되어 있다. 이열의 그림에는 앵포르멜과 액션페인팅과 같은 작가의 행위와 제스처와 같은 수행성(performativity)이 중요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그의 회화적 추상작업에 등장하는 '흔적'에는 시간의 흐름이 자연스럽게 축적된다. 


 이열은 그동안의 작업과 달리, 2018년 개인전에서는 오브제 작업으로 새로운 실험을 모색하고 있다. 그동안 그가 보여주었던 회화라는 장르를 조금 더 확장시켜 거울이라는 새로운 속성에서 추상회화에서 시도했던 회화적 흔적과 시간의 흔적(vestige)을 확장시켜 나가고 있다. 일차적으로 그가 이러한 거울을 사용하게 된 동기는 상당히 오래 전부터 시작된 것 같지만, 결정적으로는 파리에서 레지던시로 그가 일 년 동안 체류하면서 회화의 확장을 꾀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파리의 벼룩시장, 앤틱 마켓 등에서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던 거울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거울은 자기반영적 효과, 즉 사람을 비추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또한 거울의 프레임은 마치 회화의 프레임처럼 동시대성이 잘 반영되어 시대적 트렌드와 함께 가기도 한다.  


 이열의 거울은 야요이 쿠사마와 같은 일부 작가들이 사용하는 거울처럼 자기부정과 강박적 심리효과를 추구하지 않는다. 이열의 거울 작업들은 거울 아래에 작가가 그린 드로잉 효과, 그림의 선, 색채 등이 자유롭게 유영하면서 이미지를 서서히 드러내고 있다. 또한 거울 작품에서는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이미지들이 다르게 보인다. 거울 표면을 깍아낸 표면의 흔적들은 마치 암각화의 표면을 연상시키는 것처럼 오랫동안 쌓아온 시간성의 흔적, 지표성(index)을 지시하는 것 같다. 거울에서 온전하게 보이는 관람자들의 모습은 이열의 회화적 거울 앞에서는 자신의 모습이 보이는 듯, 보이지 않는 신기루처럼 흐린 이미지의 잔상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잔상은 작품을 본 이후에 자연스럽게 심리적 잔상, 기억 속에서의 잔상을 만들어 그동안 회화 작업에서는 엿보기 어려웠던 관람자와의 교감이 조금 더 긴밀하게 이뤄지게 한다. 


 2018년 노화랑에서의 개인전에서 처음으로 선보이는 '거울 작품'들은 몬드리안의 그리드 추상회화에서 영감을 받은 작업들도 있으나, 거울 아래에서 빨강과 노랑 등은 점차 예기치 않은 다른 색채로 변화하는 과정을 거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거울 작품은 제작 과정 자체에서 우연적 효과를 낳는 상황으로 이어진다. 이것은 <생성공간-변수>에서 보았던, 절제되어 있지만 거대한 자연과 우주 속에서 그 자체로 '생성'하고 자연스러운 질서와 무질서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을 연상시킨다. 다만, 이번 거울 작업은 회화작업에서와 달리, 여러 겹의 회화적 붓 터치와 이미지의 거울효과, 혹은 반추효과 등의 실험을 통해 이열 작가는 회화적 특징을 거울의 표면, 겹겹이 쌓인 시간성의 흔적, 회화적 흔적으로 변형시킨다. 이열의 추상화는 회화적 실험성을 레디메이드였던 거울 속에서 과거 수세기 전에 제작된 시간성을 현재의 관점으로 소환해 점, 선, 면, 스프레이 효과 등으로 우리의 시각성을 혼란시키며, 한편으로는 새로운 시각의 장으로 우리의 경험을 폭넓게 한다. 


 적어도 나의 눈에는, 이열의 거울 작업은 그동안 그가 집요하게 실험하던 <생성공간-변수>를 대체하는 작업이기 보다는 '생성공간'이 조금 더 자유롭게 입체적 공간과 시간 속으로 확장해나가는 지점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이러한 두 작업들은  자연스러운 매개적 공간, 중성적 공간 속에서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한 쪽은 회화로서 물감으로 물성의 공간을 형성했다면, 후자는 거울이라는 오브제의 성격으로 우리의 시지각을 조금 더 물리적으로, 또 심리적으로 개입시킨다. 


 이열의 거울 작업은 관람자의 시선을 계속에서 몰입하게 하면서도 또한 회화적 붓 터치와 이미지의 잔상효과 (거울 아래에 축적된)를 통해 관람자의 시선을 막아버리는 이중적이고 양가성을 띠기도 한다. 거울 속으로 들어가려는 관람자의 시선과 이를 묘하게 충돌시키는 회화적 이미지는 이번 거울 작업에서 관람자의 시선(gaze)을 통해 작품의 표면 속에서 충돌하는 시각성을 구축하고 있다. 그것은 재현의 충돌이자, 회화와 거울의 속성의 충돌, 거울 밖의 시간과 거울 안의 시간의 중첩 등 여러 겹의 비가시적인 속성들이 만나고 헤어지는 것으로 이 모든 것들이 거울작업의 표면 위에서 치열하게 일어나고 있다. 


 거울의 어원을 따져보면, '보다'는 의미를 지닌 라틴어 mirare에서 나온 고대 불어 mirour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리스 신화에는 나르시스가 샘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사랑에 빠지는 나르시시즘의 상징으로 등장하기도 하고, 또한 순우리말로는  ‘거구루 → 거우루 → 거울’이라는 변화과정을 거쳤다. '거구루'의 의미는 '거꾸로'였다고 하는데, 우물이나 샘 속에 비쳤던 거울 속 이미지가 거꾸로 보여서 그런 의미가 만들어진 것 같다. 이열의 거울 작업은 이러한 거울의 의미를 그대로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반영적 특징을 지닌 거울효과, 거울 이미지에 일종의 변화와 변형을 거치는 회화적 과정을 반영한다. 그리고, 자신의 작업세계를 현재의 관점에서 '거꾸로' 바라보는 비평적 거리두기를 꾀한다. 


 이열의 거울 작업은 그의 추상작업의 연장이면서 회화적 제스처를 그림의 프레임 밖에서 실험해보는 집요한 노력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거울이라는 매체의 특수성으로 인해 이열의 거울 작업은 시간성을 자연스럽게 회화적 표면으로 옮겨놓았다. 이를 통해 관람자들은 조금 더 적극적으로 거울 표면 안에서 유희적으로 걸어보거나 조금 더 직접적으로 거울 속으로 들여다보거나, 아니면, 자신의 얼굴을 비추며 퍼즐을 맞추듯이 이미지를 바라보게 된다. 왜냐하면 회화적 잔상과 거울 표면의 스크래치 효과로 인해서 그의 거울은 이미지를 '불완전하게' 보이게 하기 때문이다. 이열의 거울 작업은 이단화, 삼단화와 같은 서구의 제단화, 혹은 한국의 병풍처럼 여러 개의 패널로 구축되어 있는데, 그는 이번 전시를 통해 전시 공간 전체를 삶의 미장센으로 치환시키는 면모를 보인다. 그것은 단순한 회화적 프레임의 확장을 넘어 공간 전체를 새로운 관점에서 사물을 바라보려는 시각성을 반영한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거울의 표면 위에서 회화적, 심리적 긴장관계를 구축해 가는데, 그것은 <생성공간-변주>보다 더 관람자와 긴밀하게 교감한다. 이러한 거울 작업 속에서 관람자는 훨씬 더 관계적이며, 개입적인 상황을 연출한다.